이성과 감성. 현실적인 상황에선 이성을 택해야 하지만, 감성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 모두를 만족시켜주는 건 없는 걸까?
흰색 차체에 붉은 톱의 조화냐, 붉은 차체에 검정 톱의 조화냐. 포르쉐 매장에서 이런 고민 좀 해봤으면 참 좋겠네
포르쉐의 아이콘은 911이다. 카이엔과 파나메라가 아무리 포르쉐 캐시카우 역할을 한다 해도 그들이 포르쉐의 아이콘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박스터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911이 포르쉐의 아이콘 타이틀을 내려놓는다면, 차기 주자는 박스터가 될 것이다. 이성은 앞서 언급된 캐시카우가 돼야겠지만, 감성을 버릴 수 없는 포르쉐 아니던가. 두 대의 박스터(모두 S)를 불렀다. 한 대는 자연흡기 엔진을 얹고 있는 마지막 박스터(981)고, 다른 한 대는 터보를 두르고 등장한 718 박스터다.
포르쉐 마니아가 아닌 이상, 1초 안에 어떤 모델의 무슨 트림인지 대답하기는 힘들다. 심지어 911과 박스터를 구별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다. 포르쉐는 큰 변화 없이 조금씩 디자인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큰 변화라고 말한다. 포르쉐가 공랭식에서 수랭식으로 바꾼 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터보차저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911부터 시작된 터보화는 박스터와 카이맨까지 이어졌다. 다운사이징은 더 이상 자동차 업계 이슈는 아니다. 대부분이 동참했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는 소비자도 마찬가지다. 다운사이징을 싫어하는 소비자도 더는 자동차 회사를 원망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날로 심해지는 환경 규제를 맞출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실린더, 배기량을 줄이는 방법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운사이징과 전혀 상관없는 자동차도 있지만, 가뭄에 콩 나듯 보기 힘든 자동차가 대부분이다.
저기 보이는 황금색 바나나 가격이 우리 <카> 매거진 공식 의전 차량인 레이 가격과 비슷하다
구형이 돼버린 981은 지금 판매하고 있는 신차라고 해도 전혀 어색할 게 없는 모습이다. 그만큼 디자인 완성도가 뛰어나다. 개인적으로는 718보다 더 멋지게 보였다. 탄탄한 자태를 떠받치는 20인치 휠과 그 안에 자리 잡은 황금색 바나나(PCCB). 분명 브레이크 페달에 발만 대도 말도 안 되는 중력이 차체를 아스팔트로 잡아끌어 내릴 것이다.
화사한 베이지 시트에 때라도 묻을까봐 조심스럽게 비루한 몸을 던져 넣었다. 스티어링 칼럼 왼편에 자리한 키박스에 키를 꽂고 잡아 돌려 우렁찬 배기음을 토하게 했다. 참고로, 포르쉐는 키박스가 왼편에 자리하는데, 이는 모터스포츠에서 유래했다. 차에 타자마자 시동을 걸고 기어 레버를 움직여 부리나케 출발하기 위해서는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키박스를 두어야만 양손으로 모든 걸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놓고 보니 많이 바뀐 718 박스터
오늘(8월 7일)은 입추다. 가을의 문턱에서 로드스터를 시승한다는 게 낭만 있어 보이지만, 트렁크 위에 날달걀을 깨놓으면 프라이가 될 것같이 폭염이 기승이다. 그래도 박스터는 오픈을 해야 제맛이다. 버튼을 누르면 빠른 속도로 접혀 들어가는 소프트톱은 9초 만에 뜨거운 볕을 모두 받아들인다.
PDK는 빠르고 부드럽게 기어를 바꾸며 언제라도 튀어 나갈 준비를 한다. 시내에서도 기분 나쁜 승차감이 아닌 단단한 설정의 서스펜션. 요즘 스포츠카가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 중 하나인 ‘데일리 카’까지 충분히 해낸다.
엄지를 길게 뻗어 스포츠 리스폰스 버튼을 누르면, 솟구치는 태코미터와 폭발하는 사운드. 어린 시절 ‘터보’는 꼭 버튼을 눌러야만 되는 건 줄 알았는데, 틀린 건 아니었다
외곽에서 본격적으로 달려보기 위해 스포츠 플러스로 돌리고 가속페달에 힘을 실었다. 뭔가 막혀 있던 체증이 뚫리듯 한 움큼의 기체를 토해내는 테일 파이프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rpm의 변화에 따라 아름다운 선율을 울리는 금관악기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작은 공간에 잘도 욱여넣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은 수평대향 6기통 3.4ℓ자연흡기 엔진에서 시작된다. 뇌에서 가속페달을 밟으라고 다리에 명령을 내린다. 가속페달이 눌리면 신호를 받은 ECU는 운전자가 원하는 만큼 스로틀을 열어젖혀 공기량을 조절해 연료와 동침을 시킨다. 스파크 플러그가 이를 시샘하며 불꽃을 일으켜 짧은 사랑은 끝이 나지만, 그 사랑의 세레나데는 대기로 빠져나오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노래가 된다.
깔끔한 베이지 톤의 실내. 혹여 이물질이 묻지 않을까 오르내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밝은색 실내는 보기에만 좋다고 누군가 그랬다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의 장점은 모두가 알고 있듯 매끄럽고 빠르게 돌아가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다. 덕분에 가장 바빠지는 건 눈동자와 맥박이다. 두 손을 핸들에서 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다가오는 전방 가로수가 어느덧 옆으로 지나치기에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게 되고, 사물이 또렷이 보이지 않을 만큼 속도가 올라가면 맥박이 정신없이 날뛴다. 그렇게 빠르던 속도도 브레이크 페달을 강하게 밟으면 전쟁 영화에서 총알이 날아가는 걸 자세히 보여주는 슬로비디오처럼 가로수들이 아주 천천히 지나가게 만들며 이내 정지 화면으로 만들어버린다. 시승차에 꽂혀 있는 PCCB가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다.
보자 보자… 어디가 바뀐 건가?
에어 벤트가 사각에서 원형으로 바뀌었고, 크로노 위치가 바뀌었군. 스티어링과 디스플레이 모니터의 변화가 가장 크다
4기통 터보 엔진을 깨우자 생각보다 조용하게 실린더를 돌린다. 톱을 열지 않아 그런가? 981이 요란한 건가? 718 박스터 S의 가속 능력(0→100km/h)은 4.2초. 소문은 익히 들었으니, 직접 느껴봐야겠다. 7초(구형보다 2초 빨라졌다) 만에 톱을 열고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자 시트에 상체가 묻히며 정신이 몽롱해진다. 머릿속에서 얌전히 흐르던 피가 외부 영향으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탓에 정신이 흐려지는 게 분명했다. 소문대로 빠르다. 981 박스터와 간격이 점점 벌어진다. 여러 번 배틀을 해봐도, 운전자를 바꿔도 결과는 똑같다. 하긴, 수치상으로는 구형보다 모든 걸 압도하는 718 아니던가. 718의 최고출력은 350마력으로 981대비 35마력 올랐으며, 최대토크는 36.7kg·m에서 42.8kg·m로 세졌다. 981은 최대토크를 4500rpm에서 토해내지만, 718은 1900rpm에서 뿜어낸다. 대폭 앞당겨진 토크 분출 시점이 제대로 된 스프린터를 만들어냈다.
981로 718 박스터를 꼬리에 두고 달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터보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잡아 돌리는 핸들과 그것에 맞게 방향을 트는 휠 사이에 부속품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유격 따위는 없다. 철저히 드라이버의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다. 이런 재미에 심취해 가끔 뒤가 돌아가는 등골 싸늘한 순간이 다가오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전자 장비가 개입해 자세를 바로잡는다. 드라이버는 본인이 순간 대처를 잘했다고 으스대지만, 말은 바로 하자. 전자 장비가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거다.
오른쪽이 718 박스터. 비히클 아래 자리한 골뱅이 그림이 얼마나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그래프 끝까지 올려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이는 어린 시절 바람개비를 잡고 입을 크게 벌려 ‘하~’ 부는 것과 입을 오므려 ‘후~’ 하고 부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어느 쪽이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아가게 할까? 당연히 입을 오므렸을 때다. 입을 오므리고 벌리는 역할을 추가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최고의 성능을 끌어낸다. 또한, 718 박스터는 다이내믹 부스트 기능으로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도 일정 시간 스로틀을 열어둬 부스트압을 유지한다. 덕분에 가감속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도 항상 최고의 성능을 이끌어내기에 터보랙 따위는 잊을 수 있게 됐다.
초롱초롱했던 눈망울이 매섭게 바뀌었다. 4개의 포인트를 가미한 헤드램프는 테일램프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래도 981이 더 예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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